「식후에 이별하다 」 심보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 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2019.08.25
「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 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2019.08.17
「지상에 없는 잠」 최문자 어젯밤 꽃나무 가지에서 한숨 잤네 외로울 필요가 있었네 우주에 가득찬 비를 맞으며 풀잎 옆에서 자고 깨 보니 흰 손수건이 젖어 있었네 지상에서 없어진 한 꽃이 되어 있었네 한 장의 나뭇잎을 서로 찢으며 지상의 잎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네 저물녘 마른 껍질 같아서 들을 수 없는 말 .. 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2019.08.08
「살아남기」김기홍 살아남기 김기홍 빚으로 공사하는 회사들 자빠지고 돈맛에 벌여놓은 낙지발 회사도 넘어지고 일 끊겨 돈 못 받는 인부들 속처럼 중단된 공사장 철근도 벌겋게 삭아내려 일 구하기가 사십대 노총각 이십대 처녀 붙들기보다 힘들어 자존심이란 자존심 팽개치고 어쩌다 기별 온 공사장에 .. 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2019.08.02
「 전화」문성해 내 전화 벨소리가 당신의 빈 집을 울릴 때 내 초조한 눈빛은 당신이 구부려 밥을 끓이는 부엌과 칼잠을 자는 안방과 매 끼니 푸성귀를 구하는 앞마당을 다 훑고 오늘 당신의 벨소리가 나의 빈집에 당도 하였을 때 당신 이마 위 근심도 내가 웅크리고 앉아 있을 낡은 소파와 무언가를 끓여.. 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2019.07.20
「오늘 같은 날」 고정희 오늘 같은 날 솔바람이 되고 싶은 날이 있지요 무한천공 허공에 홀로 떠서 허공의 빛깔로 비산 비야 떠돌다가 협곡의 바위 틈에 잠들기도 하고 들국 위의 햇살에 섞이기도 하고 낙락장송 그늘에서 휘파람을 불다가 시골학교 운동회날, 만국기 흔드는 선들바람이거나 원귀들 호리는 거문.. 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2019.06.25
「바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조용미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 나의 내면이 고요할 때 바람은 어디에 있었나 생나무 가지가 허옇게 부러진다 버즘나무 널따란 잎사귀들이 마구 떨어져 날린다 개태사 앞 향나무는 뿌리째 뽑혀 쓰러졌다 마당에 기왓장이 나뒹군다 바람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키 큰 소나무들이 마구 쏟.. 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2019.06.08
2019년 계간《불교문예》여름호「메리골드 씨앗을 받으며」외1편 김명옥 메리골드 씨앗을 받으며 묶었던 머리카락 풀어 빗질하는 저녁 바람에 취한 시간의 비늘들이 말라가는데 그리 살지지 않았던 꽃밭 독을 숨겼거나 약을 숨겼거나 잡고 싶었던 손 놓쳐도 그뿐 어차피 모두 지고 말 뿐인데 누가 부러뜨렸을까 늙은 꽃대 어루만지며 충혈된 눈 비벼봐도 찾을 수 없는 서글픈 성감대 병든 개가 제 발을 하염없이 핥듯 제 상처 외에는 아무것도 아프지 않았었지 그래서 씨앗들은 이승을 훌훌 떠나 보는 것일까 깡마른 손으로 머리핀을 꽂고 나는 왜 꽃밭을 떠나지 못하는지 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2019.06.01
「아버지의 그늘」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 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2019.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