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누구나 마지막 춤 상대가 되기를 원한다. 마지막 사랑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마지막이 언제 오는지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음악이 언제 끊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마지막 춤의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상대와의 춤을 즐기는 것이 마지막 춤을 추는 방법이다. - 은희경의《마지막 춤은 .. 생을 그리는 작업실 2006.01.11
약속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새로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톳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詩 천상병 생을 그리는 작업실 2006.01.05
흔들지마 흔들지 마, 사랑이라면 이젠 신물이 넘어오려 한다. 내 잔가지들을 흔들지 마. 더이상 흔들리며 부들부들 떨다 치를 떠느니, 이젠 차라리 거꾸로 뿌리뽑혀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프라하에서 한 집시 여자가, 운명이야, 라고 말했었다. 운명 따윈 난 싫어, 라고 나는 속으로 말했었다. 아름다움이 빤빤하.. 생을 그리는 작업실 2005.12.15
시간퇴행(時間退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젊음은 아름답지 않았어 가난이 질척거리는 길바닥 맨발의 슬픔으로 그대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 때로는 미농지처럼 바스락거리는 목숨으로 마른 꽃잎 한 장도 끼워 두었지 언제나 그대는 주소불명 편지는 반송되고 밤마다 허기진 불빛으로 돌아오는 남춘천 마지막 열차 나는 .. 생을 그리는 작업실 2005.12.08
술 한 잔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가을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 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詩 정호승 생을 그리는 작업실 2005.12.01
화무십일홍 그를 애타게 기다린 적이 있었다. 스무 살 때는 열손가락 활활 타는 불꽃 때문에 임종에 가까운 그를 기다렸고 내 나이 농익은 삼십대에는 생살을 좍 찢는 고통 때문에 나는 마술처럼 하얗게 늙고 싶었다 욕망의 잔고는 모두 반납하라 하늘의 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지면 네 네 엎드리며 있는 피는 모조.. 생을 그리는 작업실 2005.11.24
임종고백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이는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게 무엇보다도 두려워서였다. 나의 한 치 마음 안에 천 길 벼랑처럼 드리운 수렁 그 바닥에 꿈틀거리는 흉물 같은 내 마음을 나는 마치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환자처럼 눈을 감거나 돌리고 살아왔다. 실상 나의 지각(知覺)만으로도 .. 생을 그리는 작업실 2005.11.03
땅의 사람들 겨울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도시에서 지금 돌아온 사람들은 폭설주의보가 매달린 겨울숲에서 모닥불을 지펴놓고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가움을 녹이며 조금씩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며 자기 몫의 봄소식에 못질을 하고 있다 물푸레나무숲을 흔드는 이 지상의 추위에 못질을 하고 있다 가까.. 생을 그리는 작업실 2005.10.27
우울증 겨울 안개 길고 긴 터널 모든 것이 무사해서 미친 중년의 오후 전조등 하나 없는 회색 속을 걸어간다 가방에는 몇 개의 열쇠가 들어 있지만 진실로 갖고 싶은 열쇠는 없다 기적이란 신의 소유만은 아니었구나 지나온 하루하루가 모두 기적이었다 돌아보니 텅 빈 무대 아래 반수면 상태로 끝없이 삐걱.. 생을 그리는 작업실 2005.10.20
술먹고 싶구나 1 술 먹고 싶구나 버릴 것 다 버리고 그렇게 빈속으로 술 먹고 싶구나 취하고 또 취해 다시 깰 때까지 사람 아닌듯 밤새 술 먹고 싶구나 내 마음 시궁창에도 날마다 별은 뜨고 이따금 다음 세상의 음악이 울려나는데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거냐 나는 어느 길 위에 서 있는거냐 한 마리 겨울 들개처.. 생을 그리는 작업실 2005.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