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cil & pastel on paper
당신보다 더 늙은이 또 있을까
말 없는 늙은이의 품 속처럼
아늑하고 아득한 곳 또 있을까
구수한 곰팡내 나는 당신의 늑골을 베고 누우면
당신 속으로 난 무수한 계단이 보이고
주름만큼 빼곡한 서랍들이 보이네
당신보다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실은 당신의 빛나는 늙음이 부럽기만 하여)
난 겁도 없이 당신 가슴 속 서랍을
하나씩 빼 보는 것이네
눈 감고도 찾을 수 있는 당신의 정리벽이 놀랍기만 한데
당신의 판도라가 되어 고리를 당길 때마다
튀어 나오는 무수한 별자리들, 다 기억할 수 없는 당신의 아들 딸
괴물들의 두상과 주술, 사라진 것들의 울음, 날개의 잔해……
숱한 낮과 밤의 이야기들이
당신의 절절한 사연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네
당신 품에 안긴 내 몸 밖으로
해와 달 번갈아 뜨고 지네
계절이 순번 없이 물러섰다 다가서네
당신에게 안기는 건 당신의 한 페이지 살갗이 되는 것
어느 새 나 또한 당신의 에피소드가 되어
차곡차곡 접혀 서랍 속으로 들어가고 있네
제 발로 들어가고 있네
당신의 만년설 같은 백발이 치렁치렁해지는 동안
詩 강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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