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우물 하나 / 정해종

무디따 2011. 6. 1. 22:57

 

 

 

 

 

 

 

감자처럼, 산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려 살던 서울특별시 밤골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확, 잡아채면 씨알 잘은 오십 가구가
후두둑 나앉을 것 같았습니다. 저녁이면 오리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던 개울이 오십 가구의 곁을 흐르고, 그 개울을 따라
나는 아카시아 꽃잎처럼 얌전하게 떠내려가고 싶었지요

밤골 사람들 빈 초롱 들고 이른 새벽부터 썩은 나무다리 위에서
삐끄덕거릴 때, 덜 깬 잠으로부터 그리하여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누군가 중얼거렸지요. 함지박 가득 눈부시게 출렁이는 물덩이.
십일조처럼 떨구고 간 물들이 골목을 적시어 놓고
밤골 사람들 마음까지 적시어 놓았지요. 이른 새벽부터 말입니다
채 마르지 않은 하루의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
어른들이 부끄러운 곳을 씻는다는 희미한 개숫물소리
머리맡으로 자꾸 들려왔지요. 눈감으면 알 것도 같았습니다
밤골 사람들 쉽게 사랑에 빠지던 이유를

욕심 없는 꿈을 꾼 밤골 사람들
성지순례를 나서듯 이른 새벽 우물가에 모여듭니다
일찍이 가난할수록 줄 서는 일이 힘들다는 걸 눈채챈것도
영원히 마르지 않는 것들을 믿기 시작한 것도
이 이른 새벽의 우물가에서였지요
그 우물 밀리고 덮이고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한여름에도 결코 바닥을 드러낸 일 없는 투명한 물줄기는
지금 다 어디로 스며들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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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가난할수록 줄 서는 일이 힘들다는 걸 눈채챈것도
영원히 마르지 않는 것들을 믿기 시작한 것도
이 이른 새벽의 우물가에서였지요

한여름에도 결코 바닥을 드러낸 일 없는 투명한 물줄기는
지금 다 어디로 스며들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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