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또 다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최영미

무디따 2011. 3. 21. 16:03

 

 

 

 

 

 

 

불꺼진 방마다 머뭇거리며,
거울은 주름살 새로 만들고
멀리 있어도 비릿한 냄새를 맡는다
기지개 켜는 정충들 발아하는 새싹의 비명
무덤가의 흙들도 어깨 들썩이고
춤추며 절뚝거리며 4월은 깨어난다

더러워도 물이라고 한강은 아침해 맞받아 반짝이고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가 짧게 울려퍼진 다음
9시 뉴스에선 넥타이를 맨 신사들이 침통한 얼굴로
귀엣말을 나누고 청년들은 하나 둘 머리띠를 묶는다

그때였지
저 혼자 돌아다니다 지친 바람 하나
만나는 가슴마다 들쑤시며 거리는 초저녁부터 술렁였지
발기한 눈알들로 술집은 거품 일듯
부글부글 취기가 욕망으로 발효하는 시간
밤공기 더 축축해졌지
너도 나도 건배다!
딱 한잔만

그러나 아무도 끝까지 듣지 않는 노래는 겁없이 쌓이고
화장실 갔다 올 때마다 허리띠 새로 고쳐맸건만
그럴듯한 음모 하나 못 꾸민 채 낙태된 우리들의 사랑과 분노,
어디 버릴 데 없어 부추기며 삭이며 서로의 중년을 염탐하던 밤
새벽이 오기 전에 술꾼들은 제각기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택시이! 부르는 손들만 하얗게, 텅 빈 거리를 지키던 밤
4월은 비틀거리며 우리 곁을 스쳐갔다
해마다 맞는 봄이건만 언제나 새로운 건
그래도 벗이여, 추억이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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