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가에서 한발짝 물러난 바닷속에 또 하나의 작은 섬이 떠 있었다.
섬이라기보다 돌팔매질한 작은 돌멩이와 같은 바위섬이었다.
섬 속에 또 하나의 섬이 떠 있는 셈이었다.
그 바위섬 속에 한눈에도 암자임을 알 수 있는 건물이
마치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석화(石花)처럼 세워져 있었다.
간월암이다.
나는 하늘도, 바다도 모두 붉은 핏빛으로 충혈되어 있는 풍경 속에
나는 석양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눈부신 암자의 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곳으로 갈 수 없었다.
부풀어오를 대로 오른 만조는 섬에서 암자로 가는 길을 바닷물로 막아버린 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암자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바닷가에 앉아 물이 빠져 간조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껏 물은 차 올라와 그 고비가 지난 후였으므로 파도는 조금씩 기세를 잃고 썰물로 돌아서고 있었지만
아직도 바닷물은 깊어 걸어서 암자로 가기까지는 한참을 더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키 작은 대나무 숲이 우거진 섬의 기슭에 주저앉았다.
어리잡아 간월암이 있는 섬까지의 거리는 백여 미터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
그 짦은 거리를 바닷물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섬 속의 섬인 간월암은 하루에 네번씩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일어남으로써
밀물 때엔 꼼짝없이 섬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아 고도(孤島)가 되어버린다.
간월도라는 섬의 이름은 문자 그대로 '달을 보는 섬'이라는 뜻.
고려말의 왕사(王師)인 무학대사가 이 섬의 암자에서 달을 보고 도를 깨쳤다 하여
섬의 이름이 백제 때부터의 이름인 피안도를 버리고 간월도가 되어버렸다.
무학 대사라 하면 1327년에 때어나 1405년에 죽은 고려 말의 중.
속성은 박 씨로 서산군 인지면 모월리에서 태어났다.
18세의 나이로 출가한 그는 고려말의 명승 나옹 혜근 왕사의 인가를 받고 그의 법제자가 되었다.
그가 26세의 청년시절이었던 1353년. 일찍이 진주의 길상사와 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도를 닦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운나라의 연경으로 유학을 떠나려 하기 직전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이 섬으로 건너와 스스로 절해(絶海)인 이곳에 와서 몸을 감춘다.
그때가 공민왕 2년.
그는 이 암자에서 마침내 바다 위에 뜬 달을 보고 홀연히 오도(悟道)하였으니
그 이후부터 이 섬의 이름은 간월도로 바뀌어 불려지게 된 것이다.
한때 이 암자는 조선왕조를 건국한 이 태조의 스승이었던 왕사 무학 자초대사가 도를 이룬 곳이라 하여
각별한 우대를 받았으나 그 이후 불교를 억압하는 조선왕조의 배불정책으로 말미암아
헐리고 황폐하게 되어버렸다.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도를 깨우쳤던 절터는 무너지고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절터에는 묘자리까지 들어서 묘밭이 되고 말았다.
이 묘터가 다시 사라지고 옛모습 그대로 복원된 것은 만공 스님의 노력 때문이었다.
그는 이 암자를 중창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계송을 읊었었다.
'兩聖古跡幾春秋 往事無非一夢幹'
그 뜻은 이러하다.
'두 성인(신라의 원효와, 고려말의 무학대사를 가리킴)의 옛 흔적이 몇 해나 되었는고,
지난 일들 모두가 한바탕의 꿈이로구나'
최인호 '길없는 길'중에서
.
.
.
내 가슴 속 절해고도로 남아
삶의 파고 드높아 질 때마다
해무같은 그리움으로 스며오던 간월암
필연처럼 수덕사와 함께 두어 번 찾았지만
최인호 님의 '길없는 길' 속에 길은 찾기 어려웠으니
첫사랑의 연인을 몇 십 년 후에 만난 듯
그냥 소설 속에 남겨 두었더라면 하면서도
'간월암' 하면 발길이 그리로 옮겨지니
미련이란 아마도 이런 것인가 보다.
다시는 찾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 바람처럼 흘러 갈 간월암
그 때는 달을 보며
'지난 일들 모두가 한바탕의 꿈이로구나' 말할 수 있었으면...
'여행자를 위한 서시 > Wayfaring Strang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그 겨울의 환희를 꿈꾸며 눈보라 속으로 (0) | 2010.01.06 |
---|---|
간절곶,통도사 (0) | 2010.01.01 |
청양 장곡사,부여 대조사, 신성리 갈대밭 (0) | 2009.11.14 |
청계산 청계사 (0) | 2009.10.22 |
오대산 월정사,상원사,사고지(史庫址) (0) | 2009.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