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운주사 雲住寺 (1) : 09. 02. 01

무디따 2009. 5. 24. 18:01

 

                                                      운주사 雲住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강리와 대초리에 걸쳐 있는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雲住寺(사적 제312호)


대한 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옛날부터  運舟, 運柱, 雲住 등 다양하게 불려 왔지만

전남대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雲住寺>라는 암막새 기와가 확인되면서 [구름이 머물다 가는 절]이란 雲住寺가 일반화 되었다.

 

 

 


우리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 어느 사찰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운주사에 관한 믿을 만한 기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전해 오는 전설은 많다.

또한 운주사 석조 유적에 대한 가장 큰 의문은 누가, 언제, 왜 이런 독특한 형태의 대규모 불탑과 불상을 건립했는가 하는 것이다.

확실한 기록이 없다는 것과 불탑과 불상이 정통양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시대별 양식을 기준으로 편년정도 추정할 수 있으나,

운주사의 불상과 불탑은 정통적인 양식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 실증적인 해석이 어렵다.

(불상과 불탑의 조성을 짧은 기간 내 비전문가가 시행한 것이라.....? : 솔나리)


이 절의 창건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영암 출신인 신라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풍수지리에 근거해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 모양으로 보고,

선복船腹에 해당하는 호남 땅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하여

도력道力으로 천불천탑千佛千塔을 하룻밤 사이에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주사運舟寺라고도 불렀다..


이 천불천탑을 조성한 이유 중 하나의 가설로

경내 산기슭에 있는 칠성바위를 보고 착안 한 것으로, 운주사의 천탑은 하늘의 별자리를 지상에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밖에 몽고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팔만대장경과 같은 의도로 조성했다는 설,

미륵의 혁명사상을 믿는 노비와 천민들이 들어와 천불천탑과 사찰을 만들고 미륵공동사회를 열어 놓았다는 등의 주장이 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고려의 승려 혜명惠明이 무리 천여 명과 함께 천불천탑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혜명이 970년(광종 21)에 관촉사 대불을 조성한 혜명과 동일한 인물이라면

운주사는 고려 초기에 건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雲住寺 在天佛山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    석실에는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는 내용으로 보아

정말 그때까지만 해도 석불석탑이 일천 기씩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조선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   운주사는 현의 남쪽 이십오 리에 있으며

 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일천씩 있고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 >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천씩의 석불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말미에 금폐今廢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남대박물관이 1984년과 1988년 및 1989년에 4차에 걸쳐 발굴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운주사의 초창은 11세기 초에 이루어졌고, 그 후 12, 13세기경에 두 차례의 중건을 거쳤으며, 정유재란 때 폐사된 것으로 되어 있다.

불상은 완전한 모습이 57체, 불완전한 것이 43체(이중에서 불두편이 24체, 불신편이 16체)이고,

12기의 탑과 칠성바위가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


석불과 석탑이 평지와 야산 측면의 암벽위아래에 있는데,

석불은 암석하부가 우묵하게 잘려서 자연적인 감형龕形을 이루고 있는 곳에 몇 구씩 안치되어 있거나, 간혹 산기슭 평지에 있는 경우도 있다. 

불상을 보면 각각 하나의 돌을 이용해서 앞면만을 조각하여 입체감이 없는 평판상으로 만들었는데,

그 제작 수법이 치졸하며, 도상 표현은 형식적이다.

이들 가운데 석조불감(보물 제797호), 9층석탑(보물 제796호), 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호), 와불(臥佛) 등이 대표적이다.

 

 -----------------------------------------------------------------------------------------------------------------------

 

                                                                                                                 박혜강 지음 / 이룸 펴냄 

                                                                                             장편소설 운주運舟 에는

......

천불동은 몇 가지 흥미로운 전설을 가지고 있다.

# 운주도사가 억조창생에게 무궁한 복락을 내리기 위하여 기도하던 중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흙으로 천탑을 세우고 그들이 천불로 변했다.

# 서편 산 정상의 와불이 일어나면 이곳이 도읍지가 된다.

# 사람이 병들었을 때 혈맥을 찾아 침을 놓고 뜸을 뜨는 것처럼

   지리적 조건이 쇠약한 산천에 절이나 탑을 세워 결함을 보충한다는 산천비보사찰설山川裨補寺刹說에 의해 도선국사가 세웠다.

# 능주 지방으로 이주해 온 이민족 집단이 세웠다.

# 천불천탑을 하룻밤 만에 세우면 천불동이 배로 변해서 천하에 둥둥 뜨게 되는데 마지막 한 개를 세우지 못한 채 날이 새고 말았다.

# 천불동은 용화정토龍華靜土이다.

# 미륵 혁명사상을 믿는 천민과 노비들이 이곳에 모여들어서 미륵공동체 사회를 열었다.

등등 구구하다.

------------------------------------------------------------------------------------------------------------------------


#

운주사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 바위너덜지에 비로자나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여러 기가 집단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이 인상적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 기법은 다른 곳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운주사 석탑들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적하고 둥근 옥개석(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러져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불모(석공)님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석질로 빚어 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조형자들의 기술이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싶다.


1) 운주사 9층석탑 (보물 제796호)

사역寺域 입구에 있는 현존하는 운주사 탑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탑이다.

탑 높이 0.7m로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화사하고 수려한 탑이다.

가는 옥개석(지붕돌)과 처마의 끝이 백제식 목조건물처럼 치솟아 세련미가 느껴진다.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형식과 같아서 백제계 석탑이라 한다.

큰 자연석 암반을 기단부로 삼아 그 위에 9층을 쌓았는데,

탑신석 안에 겹마름모꼴의 기하학적 무늬와 네 잎의 꽃잎 문양은 유일하게 운주사의 탑만이 간직하고 있다.

겹마름모꼴은 사방팔방에 계신 부처님을, 중앙의 네 잎의 꽃잎문양도 사방불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처마안의 무늬를 보면 밝은 빛이 하늘로 치솟는 듯한 인상이다.

운주사에 있는 각 골짜기의 부처님이 비로나자불(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만큼,

이처럼 환한 빛살이 중앙에서 하늘로 퍼져 오르는 문양을 보고 있노라면 비로자나탑이라 불러도 좋을 듯싶다.

아래 거대한 기단석도 잘라서 운반하였고,

일설에는 이 탑을 운주사 중심탑이라 하여 돛대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 건너 언덕에 있는 3층석탑 

 

2) <석불군 가>

합장수인의 모양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부처님(부처님의 빛, 광명)을 주불로 하여 배치된 형식이다.

바위너설 안에 모셔져 있는데 자세히 관찰해보면 풍우를 피할 수 있게 바위너설을 인공적으로 다듬어 낸 흔적을 엿 볼 수 있다.

바위너설이 실내의 법당 역할을 훌륭히 해낼 수 있도록 조성한 듯싶다.

 다른 곳의 불상보다도 그 생긴 모양이 특이하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가 인상적이다.

그저 우리 이웃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마치 천불천탑을 세웠던 듯 이런 식으로 불상이 배치된 것을 보면 마치 천불이 이곳에 있었던 듯싶다.

맨 오른쪽 불상 대좌 뒤편에서는 8-9세기로 추정되는 금동 불상과 여래 입상이 출토 되었다.

특이하게도 중성불의 개념을 깨뜨려 아버지부처 어머니부처 아들 딸 부처로 부르고 있는데

운주사 불상을 바위너설 야지에 집단적으로 배치한 모습과 더불어 이 또한 운주사만이 가지는 특이한 개성이라 할만하다.  


3) 운주사  7층석탑 1

정사각형의 기단에 둥그런 원형을 둘러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옥개석(지붕돌)이 육중하고 날렵해 활달한 남성적인 위용이 느껴진다.

기단석을 이렇게 반듯하게 다듬어 이곳으로 운반해 여기 꼭 이 탑을 세워야만 했던 까닭을 생각해보면 운주사 조성자들의 심오한 의도가 궁금해진다.

직선적이고 다소 가파른 처마의 선, 우람한 옥개석의 인상이 신라탑의 원형인 감포 감은사지 석탑과 유형이 닮아서

탑의 형식적 분류상 신라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예전 백제 땅인데 왜 이곳에 신라탑이 함께 조형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운주사 탑들이 던져주는 의미는 매우 파격적이다.

반듯한 기단부와 우람한 옥개석이 연이어 오른 모습이 야무지고 단단한 사내의 웅혼한 기상이 넘쳐흐르는 듯 하다.  

 

4) <석불군 나>

마치 재래 시장의 오일장 거리에 나선 듯 바위 너덜에 크고 작은 불상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서로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르고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장날의 거리 풍경처럼 길가에 소중히 기른 채소며 집짐승 산나물들을 들고 나와 전을 열고 있는 착각에 빠져든다.

세상 살아가는 인생의 아프고 슬프고 기쁜 이야기를 나누는 듯 소란스럽다가도

언뜻 보면 고요한 좌선 삼매경에 들어 주위가 언뜻 외경스럽다.

편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교차되어 오가는 듯

마음의 문을 열어 그 안에 부처님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번뇌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8만 4천 법문을 들려주는 듯싶다.

크고 작은 불상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열된 모습이 특이한 풍광을 자아낸다.  

 

5) 운주사  7층석탑 2

탑신에 개성적인 교차문양을 갖고 있는 날렵한 인상의 칠층석탑이다.

기단석도 잘 다듬어서 이곳으로 운반하여 그 위에 직사각형으로 돋을 새김하여 탑을 세웠다.

운주사의 탑의 기단부나 탑신부는 네 개의 직사각형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지붕돌)을 올려놓은 형식으로 건립하였다.

때문에 그 가운데는 텅 비어 있다.

네 개의 돌판을 이어 올려 육중한 옥개석의 무게 중심을 지탱하고 있는 그 신비로운 건축술을 생각해보면

조상들의 지혜가 어떠한 것인가를 가늠해보게 한다.

교차문양도 자세히 관찰해보면 마름모꼴들의 연속이다.

동서남북 사방의 부처의 기운이 이곳으로 한데 모여

사방팔방 부처의 세계가 아닌 곳이 없이 자비의 빛으로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기를 염원하는 깊은 뜻이 깃든 게 아닌가 싶다.  

 

6) 광배를 갖춘 불상

비로자나부처님의 수인을 하고 있는 사다리꼴형의 판석에 돋을 새김하여 새겼다.

가늘고 길게 솟은 코, 두툼한 입술 크고 긴 귓바퀴가 선명하다.

육계는 솟아 있으며 합장한 수인과 법의 자락은 그저 선만으로 처리되었다.

이러한 광배를 갖춘 불상은 매우 특이한 유형이다.

주변전체에 동글동글 구름문양의 화염문을 아름답게 음각하였다.

이렇게 화염문을 음각한 정도의 수준이라 한다면 이곳 조성자들이 불교 사상에 정통하였다는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얼굴은 뚜렷하지 않지만 권위나 위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매우 정겹고 친근감이 가는 모습이다.

발굴 조사 때 조선시대 때의 기와가 많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에 목조 기와집을 지어 모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7) <석불군 다>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한 돌부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발가락이 선명하고 그 인상 또한 친근감이 묻어나온다.

가장자리에 서있는 애기 돌부처는 마치 갓난아기마냥 정겹고 앙증맞다. 발가락과 손 모양이 너무나도 귀엽다.

운주사의 불상들이 갖는 특질들은

이렇게 너나가 따로 구분되어 높은 단위에 올라 위압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서 함께 각기 다른 개성으로 정겹게 하나 되어 있다는 그 어울림에 있다.

남편과 아내 갓난아이가 오손 도손 정겹게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

마치 부처님의 자비로운 세계가 실현된 듯 사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 탑 :

         언덕위에 있는 탑 

 

# 운주사  7층석탑 3 

 

8) 운주사  석조불감 (보물797호)

팔작지붕 형태의 돌집으로 법당 형태를 만들고

그 안에 두 분의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비교적 잘 다듬어진 불상이다.

두 분의 석불은 남과 북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다.

남쪽 불상은 코와 귀가 형식적으로 부조되어 있으며 육계肉髻는 없다.

목에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보이고, 법의는 통견이며, 주름도 도식적이다.

북쪽의 불상 역시 남족의 불상과 비슷하지만 옷속에 지권인智拳印으로 보이는 수인을 경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 40 능성현 불우조에 이 상배불이 언급되어 있다.

<雲住寺 在天佛山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 천씩 있고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자세히 보면 남북의 문설주 위아래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닳아진 것이 돌문이 달려있어 예불을 볼 때는 열고 닫았을 거라 여겨진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돌문을 열고 닫을 때 조정의 인재들이 죽어나가 세상이 시끄러워

도선국사의 아내가 이 돌문을 떼어 영광 칠산 앞바다에 내다 버렸다한다.

두 분의 불상이 거대한 돌집 안에서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는 채로 조성된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며

건축학적으로 매우 주목되는 훌륭한 작품이다. 

          

 


9) <석불군 라>

마애여래 좌상을 협시불로 보필하고 있는 불상같다.

주불인 마애여래 좌상 아래에 지금은 두분의 불상이 있으나 남아있는 기단으로 보아 여러분의 불상이 이곳에 모셔진 것으로 추정된다.

천불동 각 골짜기마다 이렇게 비로자나 부처님이 주불로 모셔진 곳에는 여러 크고 작은 불상을 함께 조성하여 불상군을 형성하였다.

여기저기 바위너설에는 불상들이 모셔진 단이 남아있는데 불상은 온데간데없다.

수많은 세월에 걸쳐 훼손되고 도난당하고 파손된 결과라고 추정된다.  

   

 

 

10) 운주사 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호)

자연적인 거북형의 영귀산에 자리한 명당탑에 비해 인공적인 거북형의 하대석 위에 자리한,

10각 기단부, 연꽃문양의 기단갑석에 둥근 탑신석과 둥근 원형의 옥개석(지붕돌)을 갖춘 아름다운 석탑이다.

원과 원으로 이어진 우주전체를 조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기단갑석에 두른 연꽃 문양, 그 위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부처밖에 없다.

탑 전체가 부처를 상징한 탑이다.

달리 보면 일반적인 탑의 꼭대기 부분인 앙화와 보륜 그 위의 보개, 수연, 보주, 찰주 등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석탑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연화탑은 현재 6층만 남아있으나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온전히 남아있었다면 그 해석이 더 용이했을 것이다.

이처럼 우아하고 개성적인 아름다운 석탑은 이곳 운주사만이 가지고 있는 최상의 석탑 예술의 특징이다.

둥근 처마를 잘 빗어 내린 옥개석(지붕돌)과 둥근 탑신의 절묘한 조화도 경이롭고 자세히 관찰해보면

기단갑석의 연화무늬의 선을 만든 정 자국이 방금한 듯 남아있다.

현재 6층이나 탑신부의 체감율이나 우리나라 석탑 층수에 관한 수리관념에 비추어 볼 때 원래는 양수 陽數인 7층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사찰 100미 100선, 하)  

 

 

# 탑 

 

# 경내의 석탑  

 

 

 

 

11) 운주사  원형구형탑

날씬하게 솟아오른 기단면석에 놓인 넓고

둥근 초가지붕 같은 기단갑석 그 위로 점차로 작아지는 육중한 원형의 옥개석(지붕돌)이 탑신을 과감히 생략해 버린 채 겹겹이 올라가 있다.

엄격한 형식과 규격을 뛰어넘어 더 본질적인 부처의 세계로 대자유의 정신으로 접근하려고 애쓰는 염원이 운주사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이 발우형 석탑이야말로 으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래 부처님인 미륵부처님이 고통에 시달리는 우리 중생을 어서 구원하러 오시라는 염원으로 발우형(스님들 공양그릇)석탑을 세웠던 듯싶다.

퇴수 후 가장 큰 발우 순으로 밑에 놓고 그릇을 쌓아올렸던 삶의 지혜처럼 둥근 돌과 돌을 포개어 쌓아올린 정성과 사상이 돋보인다.

저렇게 둥글고 무거운 돌을 어떤 건축 기술로 다듬어 쌓아올렸을까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비롭다.

이 탑은 일제시대 때 찍은 사진에는 7층이었으나, 그 후 3층이 소실되었다.  

 

12)  <석불군 마>

근엄하게 앉아있는 불상이 아버지처럼 엄숙해 보이고

그 옆에 얼굴이 반쯤 떼어진 작은 불상이 응석받이 아들 부처 같다.

예전에는 기단위의 단위에 모셔져 있었는데 훼손의 정도가 심하여 단도 사라지고 바닥의 판석위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아들불상도 제 짝이 아닌 기단석 위에 놓여져 있다.

원래는 아버지 부처 뒤에 앉아 있었는데 그 배치가 어찌되었는지 흐트러진 상태다.

아버지불상 뒤에 움푹 패여 닳아진 부분이 아들 불상이 앉았던 자리인데 잔바람에도 자꾸 들썩거려 신비롭게 파였다한다.

오른쪽의 부부부처도 원래는 어깨를 마주대고 있었는데 떼어 놓았다한다.

득남설화와 관련하여 부부 불상의 코의 파손이 매우 극심하다.  

 

13)  공사바위 

영귀산 8부 능선 산마루에 놓인 거대한 둥근 바위이다.

위에 오르면 운주사 탑과 불상들 그리고 먼 산들이 한눈에 발아래 굽어보인다.

바위 이곳저곳을 움푹 파 인공으로 조성한 자리가 여럿 보인다.

그중 가장 아래 큰 자리가 도선국사가 앉아서 운주사 천불천탑의 대공사를 관리 감독했다 하여 공사바위라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작은 자리들은 직급에 따라 제자들이 앉았던 자리라 한다.

이 공사바위는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모두 관찰할 수 있으며

비가 오면 바위 아래 움푹 패인 의지처가 있어 그곳에 들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

수많은 수행스님이나 도인들이 그 자리에 앉아 수행을 했었던 듯 반들반들 닳아져 있다.

이곳에 이 바위 한 덩어리가 솟아올라 있는 것도 신비로운데

 또 그것을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고난 받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용한 선인들의 혜안과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공사바위에서 내려다 본 운주사/천불천탑의 전경

 


14) 운주사 마애여래좌상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약 40m 떨어진 거대한 바위벼랑의 암벽의 요철 부분을 그대로 살려 부조로 새긴, 운주사의 유일한 마애불이다.

육계는 두툼하고 머리와 이마가 거의 없고, 희미한 눈썹과 기다란 코는 양각이며 귀바퀴는 음각으로 표현되었다.

타원형으로 부드럽게 부조된 상호는 눈과 입이 희미하다.

좌대는 8개의 연꽃무늬가 복련으로 음각되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이다.

오랜 풍상에 마모되어 최근에도 바위가 균열되어 떨어지는 등 파손의 정도가 극심하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마애여래좌상 위에 바위구멍이 뚫어진 걸로 보아 보호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상세한 그림으로 보면...


출처 : 바람꽃과 솔나리
글쓴이 : may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