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이생진의 독백」 박산

무디따 2018. 7. 2. 19:58









 

저는 스스로 자연産 시인이고

제 시도 자연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온상에서 길러진 화초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지요.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쳐

그 혹독한 가난에도 문학을 했습니다.

시를 썼습니다.

힘든 거야 말로 다 하겠습니까.

문학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다가

결국 고독을 찾기로 했고

고독의 질(質)이 으뜸인 ‘섬’을 찾아다니며

실컷 외로워보자 했었습니다.

 

저처럼 운명적으로

시와 예술에 빠진 사람이 누굴까 생각하다가

황진이 김삿갓(김병연)과 고흐를 불러내 오랜 대화를 하다가

대원각의 자야를 불러내 ‘내가 백석이 되어’ 얘기를 나누었지요.

시는 고독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좋아하거든요.

앞으로도 대화할 사람들이 많아요.

음악과 철학 시와의 만남 가령 니체와 바그너도....

 

제 고향은 바다가 가까운 서산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수영을 했고

일제강점기라 해양 훈련도 받았습니다.

16살 때 부친이 장티푸스로 돌아가시고

두 살짜리 막내를 비롯하여

5남매를 키워야 하는 우리 어머니는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그 때부터 제 삶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꿈이나 가정이나 청춘 사랑 따위의 따뜻한 단어들이

시골 바닷가 소년에게서 일찌감치 사라졌지요.

 교사가 되어서 시를 생각했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1955년 등사판을 밀어 제 첫 시집 ‘산토끼’를 출간했습니다.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위하여

당시 제가 재직하던 서산여고에서

서울 성남중학교로 올라왔습니다.

서울에서 집 얻을 엄두도 못 내는 실정에서

학교 사택을 제공해주었던 성남중학교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보성중학에서 명예퇴직을 한 1993년

저는 드디어 자유인에 더 가깝게 되었고

전쟁 중에 참전 군인으로 젊음을 보낸 제주도를 비롯한

회귀 본능으로 섬에 더 자주 가게 되었지요.

어릴 적부터 멀리 건너편에 바라보이던 섬들에 대한

끊임없는 궁금증을 시로 실현하기 위해....


아직도 찾아가고픈 섬이 많습니다.

새로운 섬이 아니라 이제까지 찾아다닌 섬 중에서

시 쓰기 좋은 섬을 자주 찾아 가고 싶습니다.

그곳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시 쓰기 좋은 섬입니다.

만재도 우이도 여서도 손죽도 등입니다.

만재도 하면 우럭을 잡아 매운탕을 끓여주던 윤氏 생각이 나고

우이도 하면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가지고 다니며 읽던

한氏가 생각나고

여서도 하면 불행하게 생을 마친 김만옥 시인이 생각나고....

최근에는

저와 여러 섬 여행을 많이 다녔던 지리산 벗,

손대기氏도 생각납니다.

옛날엔 동백꽃이 진하게 보였는데

이젠 자연 그대로 섬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섬 주인공 얼굴들이 보고 싶습니다.

가고 싶네요.

 

아흔을 살았습니다

구십을 살았습니다

살아보니 80에 안 보이던 것들이

90에, 이제야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들 많이 걸으세요

책 많이 읽으세요

‘작은 잔치’라 박산이 말하지만

구순이라는 이런 잔치 저는 사실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읽어야 할 책이 많고

써야할 시가 너무 많거든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2019년 6월29일 진흠모 여덟 번째

생일축하 행사에서, 이 시대의 방랑자

이생진 시인의 구순宴을 열어 시로

축하드렸다)

         






Reminiscence(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