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를 위한 서시/Wayfaring Stranger

이생진 시인과 함께하는 4.3 희생자 진혼제 -제주 다랑쉬굴 에서

무디따 2018. 4. 24. 19:37







차마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었던, 다랑쉬굴 입구




2여년 전부터 홀로 이곳에서 억울한 넋을 위로해 오신 올해 구순의 이생진 시인님






 제주문학회 부회장님과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한 송이 꽃을 바치며














울컥하는 마음으로.....








다랑쉬오름의 悲歌

 

이 생 진

 

1 잃어버린 마을에서의 패러글라이딩

너, 하늘로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돌아올 땐 용눈이오름으로 올까, 아니면

아끈다랑쉬오름에 내려 할머니에게 문안드릴까

孺人高氏之墓(유인고씨지묘)

할머니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혼자이시다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혼백상지 등에다 지곡

저승길이 왔다갔다

이어도가 여기엔 해라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우리 이대로 떠 있으면 안돼?

새소리 파랑새소리

새들도 떠 있는데

우리라고 떠 있으면 안돼?

 

삼나무 밭이 멀어지고

내가 숨었던 뒷간이 멀어지네

내 가슴 헐리던 날 아버지가 넘어지고

어머니 어제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시네

이렇게 멀어지면 저 땅은 누구 차지야

소유라면 기를 쓰고 달려드는 것인데

멀쩡한 땅 불사르고 어디로 갔는가

창수네 집 가는 길 억새밭도 멀어지네

할머니 할아버지 무덤은 누가 풀을 깎나

또 다시 악몽에 불이 붙으면 누가 불을 끈담

자꾸 멀어지면 이 마을도 나처럼 울겠네

떠난 뒤엔 무엇이 찾아올까

하늘로 갔다는 기억만 남기고 다 지워버릴까

그건 더 멀어지겠다는 심술이지

무엇이든 희망이 있을 때 위안이 되는 건데

희망이 없는 길은 걷기가 싫어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제주도민요에서

 

2 아직도 악몽 속에서

이젠 총성이 멈췄으면 좋겠어

무서운 전쟁

우린 전쟁으로 여러 차례 망했지

그와 비슷한 건달들도 무기로 위협했으니까

 

태양이 중천에 떠 있군

이제부터 태양이 하라는 대로 해

태양은 하늘에 속하는가 아니면 별에 속하는가

태양도 낮에 나오기 싫을 때가 있을 거야

달은 아직 지상을 떠돌겠지

나그네의 길을 밝히느라 밤새웠을 걸

저건 섶지코지 이건 우도 쇠머리오름

어떻게 될 세상인지 몰라도 당장은 시원해 좋군

이런 세상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

잔인한 것은 총이 아니라 사람이야

이 세상엔 입으로 망하는 사람이 많지

말조심해, 총 가진 귀신이 잡아갈라

총구는 열렸어도 입은 다물어야해

그래서 다랑쉬 입을 시멘트로 막았나

역사는 입을 막아도 사실은 새어 나오는 법

 

6 총성

총성, 또 총성이야,

‘엎드려!’

대나무 밭에 숨을까

아니야, 팽나무 밑으로 가

‘쏜다, 꼼짝 말고, 손들어!’

 

아니 너는 아직도 그 총성에 시달리고 있니

얘얘, 놀래지마, 그건 가짜야! 그 사람들 다 갔어

시대는 억새처럼 죽어 버리고

봄을 기다리는 건 뿌리 없는 허수아비야

또 다른 가짜들이 이 시대를 흔들지만

그들도 갈 날이 멀지 않았어

해골은 돌담처럼 쌓여 있고

무덤은 죽은 심장처럼 조용한데

너는 억울했어

오늘 밤 일인극이나 보러 갈까

나는 팬터마임이 좋아

우린 그것이 몸에 배여 있어

그래서 소리도 못 지르고 살았지

매운 연기로 눈물이 다 빠져나가니

피도 말라 버리더군

 

팽나무 밑에 새겨놨군

슬픈 말은 말 못하는 화강암이 어울리지

저것이 진짜 팬터마임이야

‘잃어버린 다랑쉬 마을’ 이라고

너의 형체는 없어졌지만 다랑쉬 높이는 그대로 있다고

그게 다 서러움을 쌓아올린 거라고

너의 부모는 이곳에서 갔지만

돌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어

밭을 일구고 말을 기르며 살았는데

어느 날 한마을을 태워 버렸지

10여 가구에 40여 명이

팽나무 가까이 집집마다 대밭으로 둥글게 바람 막고 살았는데

아마 저 팽나무는 기억하고 있을 거야

기억력이 왕성할 때였으니까

사람보다 앞뒤를 재며 산 덕에 아직 살아 남았군

사람은 잔인해, 불보다 잔인해

 

1992년 4월에 그러니까 불 지른 지 44년 만에

열한 구의 시신이 발굴됐다고 했어

아이 하나, 여자 셋, 남자 일곱, 모두 열 하나

 

김진생(51) 강태용(34) 박봉관(27)

고순환(27) 고순경(25) 고태원(25)

부성만(24) 이성난(24) 고두만(21)

함명립(21) 이재수(9)

 

이재수, 그때 너는 아홉 살였지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4.3의 참화를 피해

숨어 다니던 마을 사람들로

1948년 12월 18일 초토화 작전으로 희생되었다고 새겼네

그들이 사용했던 솥, 항아리, 사발 등이 굴 속에 남아 있다고

솥은 사람보다 명이 길고

굴은 솥보다 어둠이 길어

학살도 굴보다 길면 어쩌지

난 좀 늦게 갈테니 너무 서둘러 인명을 총살하지마

 

7 팬터마임

비문은 계속되는데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도지사 이름으로 되어 있어

비극이란 일어나지 않기를 원하는데

일어나니까 비극이란 말이지

그래서 두들기는 내 가슴의 팬터마임

왜, 비극이 지난 다음 무대에 올려놓고 다시 아파하는가

새가 우는군 파랑새가 대신 우는군

소나무는 푸르고 대나무는 곧고 그러니까 송죽인데

송죽이면 무엇하나 다 죽은 걸

나그네는 여름에도 겨울 옷 한 벌은 더 챙겨야 해

바깥 날씨가 차가울 때가 있지만 사람이 냉정할 때가 더 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가슴의 열기가 식지 마라야 해

내 가슴이 따뜻해야 내 이웃도 따뜻한 거야

다랑쉬가 불쌍하군

이젠 오지 않을래

봄은 아름답지만 겨울까지의 슬픔이 너무 길어

그걸 잊어야 하는데

저 비문 때문에 슬픔이 잊혀지질 않는군

허나 팽나무처럼 늙으면 할 말이 없지

오늘 일인극이 있다는데

나는 팬터마임이 좋아

그래 그것밖에는 할 짓이 없을 거야

오죽 답답하면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가슴을 칠까

이제 내려갈까

아니면 그대로 공중에 떠 있을까

우울한 비석에 궂은 비가 내리네

계속해서 말해 봐 비석아

비석이 아파할까봐 다 새겨 넣지 못한 말까지 말해봐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혼백상지 등에다 지곡

저승길이 왔다갔다

이어도가 여기엔 해라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Werner Thomas, Cel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