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시인과 함께하는 4.3 희생자 진혼제 -제주 다랑쉬굴 에서
차마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었던, 다랑쉬굴 입구
2여년 전부터 홀로 이곳에서 억울한 넋을 위로해 오신 올해 구순의 이생진 시인님
제주문학회 부회장님과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한 송이 꽃을 바치며
울컥하는 마음으로.....
다랑쉬오름의 悲歌
이 생 진
1 잃어버린 마을에서의 패러글라이딩
너, 하늘로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돌아올 땐 용눈이오름으로 올까, 아니면
아끈다랑쉬오름에 내려 할머니에게 문안드릴까
孺人高氏之墓(유인고씨지묘)
할머니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혼자이시다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혼백상지 등에다 지곡
저승길이 왔다갔다
이어도가 여기엔 해라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우리 이대로 떠 있으면 안돼?
새소리 파랑새소리
새들도 떠 있는데
우리라고 떠 있으면 안돼?
삼나무 밭이 멀어지고
내가 숨었던 뒷간이 멀어지네
내 가슴 헐리던 날 아버지가 넘어지고
어머니 어제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시네
이렇게 멀어지면 저 땅은 누구 차지야
소유라면 기를 쓰고 달려드는 것인데
멀쩡한 땅 불사르고 어디로 갔는가
창수네 집 가는 길 억새밭도 멀어지네
할머니 할아버지 무덤은 누가 풀을 깎나
또 다시 악몽에 불이 붙으면 누가 불을 끈담
자꾸 멀어지면 이 마을도 나처럼 울겠네
떠난 뒤엔 무엇이 찾아올까
하늘로 갔다는 기억만 남기고 다 지워버릴까
그건 더 멀어지겠다는 심술이지
무엇이든 희망이 있을 때 위안이 되는 건데
희망이 없는 길은 걷기가 싫어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제주도민요에서
2 아직도 악몽 속에서
이젠 총성이 멈췄으면 좋겠어
무서운 전쟁
우린 전쟁으로 여러 차례 망했지
그와 비슷한 건달들도 무기로 위협했으니까
태양이 중천에 떠 있군
이제부터 태양이 하라는 대로 해
태양은 하늘에 속하는가 아니면 별에 속하는가
태양도 낮에 나오기 싫을 때가 있을 거야
달은 아직 지상을 떠돌겠지
나그네의 길을 밝히느라 밤새웠을 걸
저건 섶지코지 이건 우도 쇠머리오름
어떻게 될 세상인지 몰라도 당장은 시원해 좋군
이런 세상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
잔인한 것은 총이 아니라 사람이야
이 세상엔 입으로 망하는 사람이 많지
말조심해, 총 가진 귀신이 잡아갈라
총구는 열렸어도 입은 다물어야해
그래서 다랑쉬 입을 시멘트로 막았나
역사는 입을 막아도 사실은 새어 나오는 법
6 총성
총성, 또 총성이야,
‘엎드려!’
대나무 밭에 숨을까
아니야, 팽나무 밑으로 가
‘쏜다, 꼼짝 말고, 손들어!’
아니 너는 아직도 그 총성에 시달리고 있니
얘얘, 놀래지마, 그건 가짜야! 그 사람들 다 갔어
시대는 억새처럼 죽어 버리고
봄을 기다리는 건 뿌리 없는 허수아비야
또 다른 가짜들이 이 시대를 흔들지만
그들도 갈 날이 멀지 않았어
해골은 돌담처럼 쌓여 있고
무덤은 죽은 심장처럼 조용한데
너는 억울했어
오늘 밤 일인극이나 보러 갈까
나는 팬터마임이 좋아
우린 그것이 몸에 배여 있어
그래서 소리도 못 지르고 살았지
매운 연기로 눈물이 다 빠져나가니
피도 말라 버리더군
팽나무 밑에 새겨놨군
슬픈 말은 말 못하는 화강암이 어울리지
저것이 진짜 팬터마임이야
‘잃어버린 다랑쉬 마을’ 이라고
너의 형체는 없어졌지만 다랑쉬 높이는 그대로 있다고
그게 다 서러움을 쌓아올린 거라고
너의 부모는 이곳에서 갔지만
돌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어
밭을 일구고 말을 기르며 살았는데
어느 날 한마을을 태워 버렸지
10여 가구에 40여 명이
팽나무 가까이 집집마다 대밭으로 둥글게 바람 막고 살았는데
아마 저 팽나무는 기억하고 있을 거야
기억력이 왕성할 때였으니까
사람보다 앞뒤를 재며 산 덕에 아직 살아 남았군
사람은 잔인해, 불보다 잔인해
1992년 4월에 그러니까 불 지른 지 44년 만에
열한 구의 시신이 발굴됐다고 했어
아이 하나, 여자 셋, 남자 일곱, 모두 열 하나
김진생(51) 강태용(34) 박봉관(27)
고순환(27) 고순경(25) 고태원(25)
부성만(24) 이성난(24) 고두만(21)
함명립(21) 이재수(9)
이재수, 그때 너는 아홉 살였지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4.3의 참화를 피해
숨어 다니던 마을 사람들로
1948년 12월 18일 초토화 작전으로 희생되었다고 새겼네
그들이 사용했던 솥, 항아리, 사발 등이 굴 속에 남아 있다고
솥은 사람보다 명이 길고
굴은 솥보다 어둠이 길어
학살도 굴보다 길면 어쩌지
난 좀 늦게 갈테니 너무 서둘러 인명을 총살하지마
7 팬터마임
비문은 계속되는데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도지사 이름으로 되어 있어
비극이란 일어나지 않기를 원하는데
일어나니까 비극이란 말이지
그래서 두들기는 내 가슴의 팬터마임
왜, 비극이 지난 다음 무대에 올려놓고 다시 아파하는가
새가 우는군 파랑새가 대신 우는군
소나무는 푸르고 대나무는 곧고 그러니까 송죽인데
송죽이면 무엇하나 다 죽은 걸
나그네는 여름에도 겨울 옷 한 벌은 더 챙겨야 해
바깥 날씨가 차가울 때가 있지만 사람이 냉정할 때가 더 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가슴의 열기가 식지 마라야 해
내 가슴이 따뜻해야 내 이웃도 따뜻한 거야
다랑쉬가 불쌍하군
이젠 오지 않을래
봄은 아름답지만 겨울까지의 슬픔이 너무 길어
그걸 잊어야 하는데
저 비문 때문에 슬픔이 잊혀지질 않는군
허나 팽나무처럼 늙으면 할 말이 없지
오늘 일인극이 있다는데
나는 팬터마임이 좋아
그래 그것밖에는 할 짓이 없을 거야
오죽 답답하면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가슴을 칠까
이제 내려갈까
아니면 그대로 공중에 떠 있을까
우울한 비석에 궂은 비가 내리네
계속해서 말해 봐 비석아
비석이 아파할까봐 다 새겨 넣지 못한 말까지 말해봐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혼백상지 등에다 지곡
저승길이 왔다갔다
이어도가 여기엔 해라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Werner Thomas, Cel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