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스물 몇 살의 겨울」 도종환
무디따
2016. 1. 9. 15:31
나는 바람이 좋다고 했고 너는 에디트 파이프가 좋다고 했다 나는 억새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강가로 가자고 했고 너는 바이올린 소리 옆에 있자고 했다 비루하고 저주받은 내 운명 때문에 밤은 깊어 가고
너는 그 어둠을 목도리처럼 칭칭 감고 내 그림자 옆에 붙어 서 있었다
너는 카바이트 불빛 아래 불행한 가계를 내려놓고 싶어 했고 나는 독한 술을 마셨다
너는 올해도 낙엽이 진다고 했고 나는 밤하늘의 별을 발로 걷어찼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너는 왜 나를 만났던 것일까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우리는 왜 헤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사랑보다 지독한 형벌은 없어서 낡은 소파에서 너는 새우잠을 자고 나는 딱딱하게 굳은 붓 끝을 물에 적시며 울었다 내가 너를 버리려 해도 가난처럼 너는 나를 떠나지 않았고 네가 절망의 영토를 떠났다고 해서 절망이 너를 떠나지 않는 것인 줄 그때는 몰랐다 서른을 넘기고도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 수 있을지 막막한 겨울이었다
이제 너는 없고 나만 남아 견디는 욕된 날들 가을은 해마다 찾아와 나를 후려치고
그럴 때면 첫눈이 오기 전에 죽고 싶었다 나는 노을이 좋다고 했고 너는 목탄화가 좋다고 했다
나는 내 울음으로 피리를 불고 싶다고 했고 너는 따뜻한 살 속에 시린 손을 넣고 싶다고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밤은 찾아오고
오늘도 운명처럼 바람은 부는데 왜 어디에도 없는가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