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교외(郊外) 박성룡
무디따
2015. 4. 10.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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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無毛)한 생활에선 이미 잊힌 지 오랜 들꽃이 많다.
더욱이 이렇게 숱한 풀벌레 울어 예는 서녘 벌에
한 알의 원숙한 과물(果物)과도 같은 붉은 낙일(落日)을 형벌처럼 등에 하고
홀로 바람 외진 들길을 걸어 보면
이젠 자꾸만 모진 돌 틈에 비벼 피는 풀꽃들의 생각밖엔 없다.
멀리 멀리 흘러가는 구름포기
그 구름 포기 하나 떠오름이 없다.
II
풋물 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풀밭엔 꽃 잎사귀
과일 밭엔 나뭇잎들
이젠 모든 것이 스스로의 무게로만 떨어져 오는
산과 들이 이렇게 무풍(無風)하고 보면
아 그렇게 푸르기만 하던 하늘, 푸르기만 하던 바다, 그보다도
젊음이란 더욱 더 답답하던 것,
한없이 더워 있다 한없이 식어 가는
피 비린 종언(終焉)처럼
나는 오늘 하루
풋물 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III
바람이여,
풀섶을 가던, 그리고 때로는 저기 북녘의 검은 산맥을 넘나들던
그 무형(無形)한 것이여,
너는 언제나 내가 이렇게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을 땐
와 흔들며 애무(愛撫)했거니,
나의 그 풋풋한 것이여.
불어 다오,
저 이름 없는 풀꽃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아직은 이렇게 가시지 않았을 때
다시 한 번 불어 다오, 바람이여,
아 사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