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을 그리는 작업실/oil painting
끽다거 (喫茶去)
무디따
2015. 3. 3. 19:49
4 F oil on canvas 2015
끽다거 (喫茶去)
작사: 청학스님 시
작곡: 범능
편곡; 박문옥
여보게,
세상살이 다 내려놓고
차나 한잔 드시게나
생이란 무생사는 본래가 허망한 것
맘자락 편히 내려놓고 만상을 들춰보게나
여보게,
세간살이 명리란 다 그런 것
있으나 없으나 모두 버리고 갈 유산인데
무에 그리 얽매이나
여보게,
세상살이 다 내려놓고
차나 한 잔 드시게나
.
.
.
중국의 선승 조주선사 종명이 수행자에게 물었다.
“혹 여기 와 본 적이 있는가?”
“아니,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차나 한 잔 마시게!”
또 다른 수행자는
“네, 전에 한번 와 본 적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 하면
조주선사는 역시 “아 그래, 그러면 차나 한 잔 마시게!” 했다.
그것을 본 원주가
“화상께서는 매양 똑같은 물음을 하시고 무엇이라 대답하던,
'차마시고 가라'고만 하시니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합니까?” 하고 물었다.
조주선사는 원주하고 부르니
원주는 “예” 하고 대답하자
또 “자네도 차나 한 잔 마시게!” 라고 하였단다.
“차나 한 잔 마시게” 이것이 무슨 뜻일까?
사실 젊은 수행승이 천리를 마다하고 조주선사를 찾아 왔을 때는
나름대로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무엇이 부처=진리입니까?” 그것이었다.
하지만 선의 세계는 언설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개구즉착(開口卽錯, 말하는 즉시 핀트가 어긋났다)’이라고 하듯이,
말(언어)을 하면 개념화되고, 그것은 곧 착(着)이 된다.
표현하는 그 순간 사어(死語, 死句=무의미한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의 선승들에게 차(茶)는 일상이다.
그 일상은 ‘유(有, 있다)’와 ‘무(無, 없다)’의 상대적 사유를 초월한 일상이며,
그것은 곧 평상심, 무심인 것이다.
- 불교신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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끽다거(喫茶去)-범능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