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울메이트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Frida Kahlo) - 1907~1954
이 세상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그려낸 페미니즘 미술가 프리다 칼로는
20세기 미술사에서 살아 생전 초현실주의 작가로 화려한 조명을 받은 화가였다
그녀 사후 그녀의 미술은 미술계에서 크게 부각받지 못했으나 프랑스 파리에서 68혁명의 봉화가 올려졌고, 제3세계(멕시코) 여성이자 장애인으로 그림을 그렸을 뿐 아니라
그림을 통해 여성의 정체성을 극렬하게 보여준 화가로 페미니즘 미술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화가는 아니었지만 세계 곳곳에서 그녀의 전시회가 열리고
그녀와 관련된 출판물과 2002년 미라맥스 영화사는 헤이든 헤레라가 출간한 픽션을
바탕으로 그녀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자신의 삶의 기록이라 할수 있는 그림은 충격적이고 섬찟하다.
프리다 미술의 뿌리가 되는 멕시코 아스텍 문화의 정서를 알지 못한 나로서는
그녀의 그림을 보는것은 고통이었다.
프리다의 일생을 따라다닌 소아마비와 교통사고 후유증은 그녀를 수술대에 32번이나 오르게 했으며 끝내 괴저병으로 다리를 잘라내야 했던 그녀의 일생은 유혈이 낭자하다.
칼로는 1907년 7월 6일 멕시코의 코요아칸에서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와 어머니 마틸데 칼데른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프리다칼로는 1922년 멕시코 최고의 명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한다.
그녀는 의사가 되길 희망했던대로 5년과정을 선택했다.
운명을 바꿔버린 교툥사고 1925년 9월 17일 버스와 열차의 충돌 사고는
그녀의 일생을 바꿔버린 사건이다.
전차에 받힌 버스는 산산조각이 났으며 프리다는 버스에서 튕겨져 나와
페인트 통을 뒤집어쓴 채 몸에는 쇠막대기가 박혀있었다.
일년 동안의 병상 생활이 끔찍하게 지루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는 그녀는
아버지의 물감과 어머니가 마련해준 특수 이젤로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초기작품의 주제는 병상의 체험, 유년시절의 소아마비 후유증의 고독함이 배여 있다.
프리다의 사랑과 결혼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의 결혼에 대한 기록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 기록이 다르다 할지라도 디에고와의 만남은 그녀의 삶을 바꾸게 될뿐 아니라
그녀가 예술가로 성장하는데 디에고의 영향력은 실로 지대했다.
디에고 리베라는 1차대전 직후 파리 몽파르나스에서 모딜리아니, 피카소 등과 어울렸지만,
큐비즘과의 결별 뒤 독자적인 미술운동에 들어간다.
그는 거장으로서 세계가 인정했던 벽화 화가였으며
현대미술사에 기록되는 특출한 예술가였다.
프리다는 술회하기를" 나는 20세에 디에고를 사랑했다.
부모님은 그가 공산주의자에다 뚱뚱해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부모님은 코끼리와 비둘기가 결혼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코요아칸에서 1929년 8월 21일 결혼식을 준비했다.
하녀에게 치마와 블라우스와 숄을 빌렸다.
또, 발에 달린 교정장치를 손보아 밖에서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1932년 프리다는 임신 2개월만에 유산을 했다.
프리다는 구급차로 헨리포드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녀는 계속해서 피를 흘렸다.
그녀의 자궁에 자리잡지 못하고 분해 되어버린 태아에 대한 절망으로 울부짖었다.
그러나 유산한지 닷새가 지나자 그녀는 연필로 상반신 <자화상>을 그렸다.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용기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동지였다.
프리다의 홀로서기와 부러진 척추 프리다와 디에고는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1933년 멕시코로돌아와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한다.
이곳에서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의 동생 크리스티나와의 애정행각(1934-1935)으로 프리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게된다
이 사건이후 별거와 이혼, 세번의 오른발 수술(1936), 재혼(1940)등으로 점철된다.
프리다는 여러 명의 빼어난 애인을 두기도 했지만 프리다와 디에고 두사람의 사랑은 여전했다.
디에고는 멕시코에서 프리다를 언제나 탁월한 화가로 불렀던 것처럼
뉴욕에서 프리다는 '홀로 선 화가' 라는 수식어가 따르게된다.
그러나 리베라의 아내라는 사실이 인기를 보태준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프리다는 디에고가 만들어놓은 발자취를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활동을 가로막는 것은 건강 뿐이었다.
프리다의 그림은 '루브르' 와 <자화상>은
'조르지 퐁피두 센터 국립 현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구겐하임 에도 그녀의 작품이 있다.
멕시코에 있던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가 파리를 정복했다고 말하며 흥분했다.
그러나 그러한 찬사에 프리다는 냉정했다.
'앙드레 브르통' 이 "나더러 초현실주의 그림이라고 하기 전까지 내가 초현실주의자 라고 생각지 못했다.내가 아는 것은 단지 나는 그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렸다"
프리다 칼로는 독창적인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자신의 환타지 그림이 외국의 '이즘' 이나 학설 같은 것이 아닌 멕시코의 전통이라는 평판을 듣길 원했다.
그녀가 사망하기 전해인 1953년 멕시코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프리다 개인전'은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녀가 개막식에 갈 의욕을 보였기 때문에 전시장 중앙에 침대를 준비했다.
그녀는 예전만큼은 아니었지만 코요아칸 의상을 입고 개막식에 참석한 것이다.
그녀는 화랑 중앙의 침대에 누워서 그녀를 축하하러 온 사람들에게 미소로 답했다
너무 많은 진통제를 복용한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시회는 예술계 인사와 비평가 등 실로 엄청난 인파였다.
그녀가 남긴 편지와 일기들을 위시해 그녀 생전의 그림과 소장품들은
디에고 리베라를 위시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코요아칸의 집을 개조해 <프리다 미술관>으로 만들어 그곳에 그녀의 모든 것이 전시 되어있다.
1954년 7월 13일 새벽에 이세상 밖으로 떠나갔다.
그녀의 마지막 일기장에는
"이 외출이 즐겁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프리다" 라고 적혀있다.
*** *** *** *** *** *** ***
지난 몇개월간 붓을 놓았다.
자신의 존재를 선으로
그어 확인하려 하는 갈망은
내 청승지곡의 무게에 눌려서
한숨지으며 소실점 속에 머물렀다.
간혹 나의 태만을 나무라긴 했지만
화실로 발걸음이 옮겨지진 않았다.
숙성되어 지는 시간이라고...사부님은 하실것 같지만.
모처럼 프리다칼로 화집에 시선을 던지며
그 추웠던 날 초라한 불기에 손을 녹여가며
연필을 잡았던 날들을 떠올려 본다.
재우지 못한 기억들도
봄의 갈피 속으로 사라져가고
이제 나머지 생을 견디고자
소울메이트와 희망을 접어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