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내 안에서 열반하는 / 석여공

무디따 2009. 11. 5. 12:55

 

 

 

 

 

 

 

 

 

 

 

 

 내가 차를 먹는 것은 무슨 커다란 바위를 불러 앉혀놓고 있지도 않은 법문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관 뚜껑을 열고 그 안의 찻잎들끼리 숨죽이고 나누는 옛적 녹록한 꿈에 대한 뒤척임을 듣는다거나 몸 풀어 제 몸속의 섬유질 질기게 잣는 마음들 나누어 나도 따라 칭칭 누에고치처럼

그 마음 안에 고요하기 위함이다.
  누가 만들었네, 누가 주었네 하는 차에 묻은 인연의 마른 검불도 털어내고 오로지 물때꼭지에서 뜨겁게 내뿜는 맑은 방사가 즐겁기도 하거니와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은밀한 그것이 찔끔, 눈물나게도 고마운 일이라 다만 입 다물고 온몸으로 차향을 회향하는 코끝 가파른 절벽에 가라앉고 싶기 때문이다.
  잘 만난 인연이라도 바람결에 거스러진 쑥대머리 되기 십상인데 잘 못 만난 인연이야 얼마나 맵고 쓰라리랴. 눈물 겨우랴. 잘 만났으니 잘 이별하자 하였어도 어디 이별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 눈물이던가. 잘 살아야 잘 죽는 것이라, 그렇게 잘 살다가 잘 죽어야 하는것이 전생의 틈바구니에서 다 갚지 못하고 짚신짝 처럼 끌고 온 것이라면 한세상 꽃같이 구름같이 잘 사는 일밖에

 더 없는 것이 행복 아닌가 말이다.
  그리하여 내가 차를 먹는 것은 잘 살다 잘 죽기 위하여 내 몸에 공양한 여러것에서 나는 삿된 향기 모두 다비시키고 꾸역꾸역 날개처럼 돋아나는 속절없음도 열반시키고 갈대의 빈속이라거나 풀피리의 젖은 속이라거나 보고싶은 것들끼리 서로 마주보기 위하여 들여다보는, 멀기도 하 멀고 깊으디 깊은 마음 안의 구멍들, 궁극의 구멍들, 환하여 그것들 환하여 더 어둡지 않게 열어주기 위함이다.

아주 즐겁게 말이다. 그래야 비로소 차가 내 안에서 열반했다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