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를 위한 서시/Healing poem

시를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찌질한 변명

무디따 2009. 4. 19. 15:51

 

 

 

간혹 시를 써보라는 요청을 받을 때 마다 "좋은 시 많은데..뭐... "하며 얼버무리곤했다.
나는 왜 시를 쓰지 못하는가?
그 변명을 하기에 앞서 고은 선생님의 "나의 시가 걸어 온 길'을 먼저 포스팅하며
나의 찌질한 변명을 해 보려고한다.

 

요즘 인터넷 동호회 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시인아닌 인사가 없다.
너도 나도 시를 쓴다.
아니, 써 댄다.

어떤 시는 대머리 아저씨 머리카락 펼치듯 앞 뒤 없는 미사여구만 가즈런히 펴 놓기도하고,
어떤 시는 부페식당 처음 온 사람처럼 보기 좋은 단어 이것 저것 무작정 수북히 퍼 담아놓고 시라고 한다.
그리고 품앗이로 서로서로 추켜세워주는 덕담만 남발하며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니...
그런 시들은 횡단보도 옆 리어카에서 파는 붕어빵처럼 쉽게 집어먹기도 하겠지만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먹은 둥 마는 둥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장광설은 텍스트로 대면하기조차 낯이 뜨겁다.

 

한 편의 시가 탄생하려면 아기를 출산하는 고통이 따른다고하는데
나는 출산은 꿈도 꾸지 못할, 잉태의 재능조차 없는 불임녀인 것을 잘 알고 있다.
불임이면 흠모하는 시인의 시를 입양해서 보듬으면 되는 것을 소유 개념으로
나의 시를 꼭 써야 하는지 나는 납득이 안된다.
벌거벗은 임금님 놀이에 나 하나 쯤 빠져주는 것이 난삽한 현 시단을 정화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환승역에서 불신지옥 예수천국 을 외쳐대는 사람처럼 낯이 두꺼워지는 날
혹여 하나 쓰게 될지도 모르나 그런 날은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찌질한 변명이 그 동안 사산되었던 나의 詩에게 바치는 천도제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태클은 엄중히 사양한다.
한다 하더라도 하꾸인 선사 버전으로 " 아~ 그래요~!" 할 뿐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