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라 (1981)
감독 : 임권택
출연 : 전무송, 안성기, 임옥경, 방희, 윤양하 더보기
장르/개봉일 : 드라마 / 1981.09.12
한 폭의 한국화처럼 아름다운 화면, 여백의 미를 추구한 영상미
1962년「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90여 편의 영화를 만든 임권택 감독은
1981년 그의 75번째 작품인「만다라」를 완성하였다.
김성동 원작의 동명 소설을 이상현·송길한이 각색하여 영상화한 이 작품은
임권택 감독의 연출력과 함께 촬영감독 정일성이 만들어낸 뛰어난 영상의 아름다움이 크게 평가된다.
임권택 감독은 다작작가로 불리우리만치 수없이 많은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가 만든 초기의 대부분 작품들은 거의가 크게 평가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당시의 우리나라 영화제작의 분위기가 대체로 그러하였지만 외화수입 쿼터를 따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영화제작이 모든 감독들을 오직 영화를 생산해내는 도구 정도로 전락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제작 분위기 속에서 만들었던 임권택 감독의 초기 영화작품 역시 편수 채우기에 급급했던
당시 제작업자들에 의한 희생물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열악한 우리 영화의 제작 조건이 어느 정도 극복된 것이
1980년을 전후한 시기이며 이때에 이르러서 임권택 감독이 어느 정도의 작가적인 양식을 가지고
만든 몇몇 영화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영화 「만다라」가 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연출세계에 있어
비로소 예술적 감각이 깃들기 시작한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전의 작품으로 「잡초」(1972), 「짝코」(1980) 등 수준 급의 작품들이 있기는 하지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객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작품은
「만다라」 가 될 것이다.
구도승인 법운 스님과 지산 스님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의 도입부는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시골길 저편으로부터 가물가물 달려오는 한 대의 버스가
화면 앞으로 다가와 옆으로 빠지는 롱테이크에 의한 지루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1분 가까이 진행되는 이 길고도 지루한 장면은 지평선 너머 저 멀리에서 가물거리며
다가오는 움직임에 대한 관객의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이 영화의 주인공인 법운 스님과 지산 스님의 험난하고도 끝없는
구도의 길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득도를 위한 두 스님의 고행의 방식은 서로가 상반된 타입으로 영화 속에서 비쳐지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같다.
법운, 지산 두 스님의 과거 행적 속에는 여성으로 인해 빚어지는 사건이 똑같이 존재하지만
그들이 대처하는 방식 또한 대조적이다.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재수중인 여학생과의 만남으로 잠자리까지 같이 하게 된 지산은
이 사건이 의외의 방향으로 확대되어 사회문제로까지 비화하자
승적이 박탈되고 급기야는 전국을 떠도는 떠돌이 땡초 승으로 전락한다.
언제나 술에 찌들어 떠도는 지산은 일견하여 망나니 괴짜 승으로 보이지만
불문의 엄격한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고행의 길을 닦는
적극적 성격의 스님으로 표현된다.
창녀로 전락해버린 과거의 여인을 지금도 찾아가 그녀의 품속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나오는
지산의 캐릭터는 불문의 계율에만 얽매이고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성불(成佛)과 견성(見性)의 도를 깨우치려는
피상적 불심에 벗어나지 못하는 대다수의 불제자에 대한 냉소적 비판으로 나타난다.
반면 법운은 어머니의 돌연한 재가로 인한 충격 속에서 사랑하던 여인을 남겨둔 채
홀연히 입산하여 중이 된다.
지극히 현실 도피적인 불문에로의 귀의는 법운에게 속세와의 인연을 선뜻 끊지 못하게 하는
내적 갈등으로 번민케 함으로써 득도하려는 그의 절실한 신앙심에 심각한 장애요소로 작용한다.
지산과 법운은 옷깃을 스치듯 만나서 며칠간의 생활을 같이 하지만
지산의 항시 술에 찌든 모습과 타락한 행동에 실망한 법운은 그를 떠나고 만다.
그러나 운명처럼 그들은 어느 절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법운은
지산의 자유분방한 의식과 거침이 없는 행동에 차츰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불문의 계율과는 상반되는 지산의 기행과도 같은 파격적인 행동이 법운의 눈에 달갑게 비쳐질 리 없지만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중생을 제도하는 의문의 승려가 지산 임을 알게 되자
마침내 그가 기행만 일삼는 땡초 승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를 깨우치기 위하여
계율의 속박마저 무시해 버리는, 해탈의 경지를 얻기 위해 스스로 고뇌하고 번뇌하는
참된 고행의 불제자임을 짐작케 된다.
심산 암자에서 참선하던 두 스님은
무당이 모셔놓은 사이비 절의 부처 상에 점안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행사를 주관해 준다. 여기에서 지산 스님은 부처는 삼라만상에 존재하며
비록 정식 사찰이 아닌 사이비 절이라도 부처님의 손길이 똑같이 미친다고 설법한다.
며칠간의 양식을 얻어 암자로 돌아오는 길에 지산 스님은 만취하여 동사하고
법운 스님은 암자와 함께 지산 스님을 화장한다.
지산 스님의 죽음은 법운 스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어렴풋이 나마
지산 스님이 그렇게도 술과 파격적인 기행으로 스스로를 자학하며 얻으려 했던
구도의 길이 무엇이었던가를 깨닫게 된다.
법운은 비로소 자신이 속세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그렇게 괴로워하고 번민하였던 것은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울로 올라온 법운은 어머니를 만난다.
낳고 길러준 어머니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도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무정한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도
이제 모두 떨쳐버리고 용서를 비는 어머니에게 "뵈었으니 되었습니다"라는
짤막한 인사로 돌아서는 법운의 모습은 비로소 무거운 짐을 떨쳐버린,
사랑도 증오도 초월한 지극히 밝고 맑은 것이었다.
이제 법운은 그 끊기 어렵다는 속세와의 미련과 인연을 훨훨 털어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 멀고 먼 고행의 길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끝없이 이어진 길에 아득히 한 대의 버스가 달려오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역시 끝없이 이어진 길로 법운이 고행의 길을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이러한 길의 이미지는 이 작품의 군데군데에 수없이 나타나며
지산과 법운이 수행을 위한 방황 중에도 길의 이미지는 마치 한 폭의 한국화처럼 아름다운 화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충분한 여백의 미를 추구한 이러한 영상 미는
이제까지의 우리 영화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영상이기도 하다.
가급적 대사를 줄이고 영상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지만
그래도 좀더 대사를 줄일 수 없었을까 하는 욕심이 생기는 것은 이 영화의 영상이
그만큼 돋보인다는 뜻일 것이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볼 수 있는 지산의 화장 장면을 보다 강렬한 영상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전체적 리듬을 볼 때 시종 지루하게 끌고만 왔을 뿐 한 군데 강력한 액센트를
찍지 못함으로써 주제의식을 확고히 부각시키는 데 실패하고 있으며
전체 작품의 분위기도 밋밋해져 버렸다. 이런 의미에서 지산의 화장 장면은
이 영화의 감정 선을 최고로 고조시키고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었다.
이승구 / 중앙대 영화과 교수
기억나는 대사/ "빌어먹을 내 마음의 점안은 누가 해 주나 " 지산스님
한 줄 영화평/ _()_ _()_ _()_ ★★★★★
만다라 1 2 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