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따 2008. 6. 8. 23:51

 

 

 

 

 

 

 

어느 비오는 날의 일기


미안해
방마다 종일토록 돌아가는 선풍기한테도 미안하고,
축축히 젖어 현관에 널부러진 신발들 한테도 미안하고,
접힌 채 뒹구는 책들한테도 미안해.
사랑이 내 인생의 유일한 알리바이라고 해서 미안하고,
삶에 저항하려해서 더욱 미안해.
왜 주변에 모든 것들에게 이렇게 미안할까?
갑자기 삼계탕이 먹고 싶어져서 미안

 
자랄 때 난 엄마 속을 좀 썩였어.
"다른 것은 속을 안 썩이는데 몸이 약해서 걱정이라고 " 엄마가 그러셨지.
지금 생각하면 아픈게 아니고 전부 꾀병이였는데....
결석한 날이면 엄마는 약병아리 속에 찹쌀을 넣어 고아주셨는데
고소한 국물과 쫀득한 찰밥 맛이 좋았어.
아파야만 학교생활에서의 자유,
집안에서의 자유,
나만의 공간에서, 혼자 고즈녁하게 지내자면
아픈것 외엔 달리 방도가 없었지.
그래선지 가끔 내 자신이 좀 가엾다 싶으면 삼계탕을 먹이곤 해
근래엔 다이어트니, 칼로리가 어쩌구하면서 먹은지가 한참 됐지만


원조 삼계탕, 한방 삼계탕,영양센타 삼계탕 집도 다양하네.
일단 자리 잡고 인삼주 한 잔 쭉 하고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를 당겨 자세를 고쳐 앉았어
생각해 보니 엄마 살아 생전
삼계탕 집에 함께 와 보지 못했네
갑자기 목이 메여 와
부실한 딸년이어서
정말 미안해요

엄마

 

허기진 영혼
오늘밤

삼계탕의 법문으로 살이 올랐을까?